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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칼럼 ⑩] 치료에서 힐링의 공간으로… 진화하는 병원 건축들

2023.12.19 6min 15sec

‘문명을 만드는 기술’로 불려온 건설은 사회의 존속과 발전 가능성을 가늠하는 바로미터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현대건설이 보유한 핵심 역량과 기술은 어떠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까요? 현대건설에서는 각 분야 전문가의 시선을 통해 이를 진단해보는 칼럼을 기획 연재합니다.


쿠텍푸아트 병원

현대건설이 2010년 준공한 싱가포르의 쿠텍푸아트 병원. 호수와 숲 등 주변 자연과 어우러진 친환경 기술을 접목한 설계로 세계 3대 친환경 인증제도인 ‘BCA 그린마크’ 플래티넘을 획득했습니다 ]


오늘날의 건축가는 건축이 세상을 바꿀 정도로 대단하지 않다는 데에 동의하는 편입니다. 새로운 진보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거주자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건축의 소명만은 여전히 유효하며, 세상의 다양한 위협에 대응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질병과의 싸움이 그렇습니다. 이제는 가정용 의료기기, 무선 통신 기술, AI 진단 기술이 발달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장소가 병원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반대로 병원은 집, 회사, 가게, 공원, 광장과 같이 다양한 기능을 포괄하며 자생하는 도시 그 자체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 질병이 바꾼 건축의 풍경


일광욕

[ 현대건축이 채광이나 일광욕을 중요시하게 된 데에는 결핵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


현대건축이 오늘의 모습을 갖추는 데에는 놀랍게도 결핵이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핵균은 인류보다 먼저 출현했지만 산업혁명 이후 도시 인구가 과밀해지면서 팬데믹을 야기했습니다. 1946년 항생제 스트렙토마이신이 개발되기까지 유럽은 결핵으로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무려 유럽 인구의 1/4이 사망했을 정도였기에 ‘화이트 페스트’라 불렸습니다. <절규>로 유명한 화가 뭉크의 슬픈 가족사와 작품에 드리운 음울한 풍경들에서 당대의 아픔을 여실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땅한 치료제가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햇빛의 살균 효과에 기댔습니다. 리클라이너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시간은 유럽인에게 중요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해가 부족할 때는 모닥불 쬐듯 자외선램프 주위로 옹기종기 모이거나 태닝 기구에 들어갔습니다. 자외선 만능주의가 만연한 나머지 정신병조차도 일광욕으로 치유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외선에 대한 과도한 노출로 피부암이 증가하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죠. 어쨌든 쾌적한 곳에서의 휴식은 환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의 아름다운 산을 배경으로 다수의 요양원들이 지어졌으며 그 시대를 대표하는 하나의 건축 유형으로 자리 잡기도 했습니다.



■ 의료의, 의료진에 의한, 의료를 위한 건축

 

파이미오 요양소

[ 핀란드의 대표 의료시설인 파이미오 요양소는 건축가 알바 알토의 작품으로 계획 단계부터 의료진의 의견을 설계에 반영했습니다 (사진 출처: wikimedia) ]


1932년에 문을 연 파이미오 요양소(Paimio Sanatorium)는 핀란드를 대표하는 위대한 건축가 알바 알토(Alvar Aalto)가 서른 살부터 설계한 건물입니다. 7층 높이에 145개의 병실을 수용하는 규모이며, 모든 병실이 남향이어야 하므로 길고 우아한 정기여객선을 닮아있습니다. 알바 알토는 요양원이 의학 기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컨베이어 벨트를 따라 자동차가 생산되는 미국식 기능주의를 의료 시스템에 도입하기 위해 의사와 협업을 시도하기도 했죠. 계획단계부터 의료진의 조언이 건축에 반영되었기에 종합병원으로 전환한 후에도 꾸준히 의료시설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파이미오 요양소

[ 파이미오 요양소는 채광을 위해 커튼월 마감과 캔틸레버 구조를 적용했습니다.(사진 출처: wikimedia) ]


가장 중점을 둔 설계는 채광이었습니다. 빛을 최대한 유입시키기 위해 창이 넓고, 자연 환기가 쉽게 창문을 여닫는 일이 수월해야 했습니다. 커튼월* 마감을 위해 철근 콘크리트와 캔틸레버* 구조는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저층과 고층의 기압 차를 이용한 자연 환기와 의료 폐기물 처리를 위한 더스트 슈트* 도입과 같이 첨단 기술의 적용도 눈에 띄지만, 환자의 입장을 고려한 섬세한 디자인이 병실 안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특히 하루 대부분을 누워서 생활하는 환자들의 ‘침대 위의 삶’을 고려한 그는 창의 하단을 최대한 낮추고, 한 번 걸러진 바람이 통하도록 이중창을 두었습니다. 창과 바닥이 만나는 부분은 일부러 경사를 내서 의자가 창에 바짝 붙지 않도록 하며, 모서리에 먼지가 쌓이지 않는 이점까지 예상했습니다.

*커튼월(curtain wall): 칸막이 구실만 하고 건물의 하중을 지지하지 않는 바깥벽을 지칭하는 말로 커튼처럼 외부로부터 비나 바람을 막는 역할만 한다고 하여 커튼월이라 부른다.  

*캔틸레버(cantilever): 모자의 차양과 같이 돌출된 구조물 형식 중 하나. 발코니나 처마 등의 돌출부에 구조적으로 채택되어 공중에 떠 있는 듯 한 효과를 준다.

*더스트 슈트(dust chute): 각 층에서 나오는 찌꺼기나 쓰레기 등을 모아서 지상까지 떨어뜨리는 빌딩의 쓰레기 처리시설.


환자의 건강에 필요한 빛과 공기를 건축물의 구조적 전략에 녹여냈다면, 위생과 심리적 안정을 위해서는 내부 인테리어를 고심했습니다. 바닥은 물세척이 용이하도록 리놀륨 소재를 사용했으며, 벽지는 울림을 최소화하는 것으로 선택했죠. 세면대의 넉넉한 볼륨은 물이 조용히 흘러내리는 각도를 실험한 결과입니다. 강철 튜브를 구부려 만든 가구와 부드러운 모서리를 갖는 벽장은 세련된 외형이기도 했지만, 환자들이 다치지 않고 손쉽게 이용해야 한다는 의도가 우선이었습니다. 조명 역시 부드러운 반사광이 퍼지도록 천장을 향하는 동시에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커버를 씌운 처리가 눈에 띕니다. 


피스타치오 색상의 깔끔한 천장은 누워 있을 환자들이 오랜 시간 쳐다보기에 지루하거나 피곤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모든 기물이 명확한 의도를 갖고 디자인되었으며, 큰 움직임 없이도 닿을 범위에 효율적으로 배치되어 마치 낯선 두 사람의 동거를 주제로 한 연극 무대와 같았습니다. 파이미오 요양원의 하이라이트는 7층 발코니입니다. 120명의 환자가 나란히 누워 일광욕하는 진풍경을 연출한 이 공간은 (간혹 병세가 깊어져 낙담한 환자가 뛰어내리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인간을 중심으로 배려한 현대건축의 좋은 사례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 백화점식 거대 병원의 탄생


카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 현대건설이 2009년 준공한 카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은 지하 6층 지상 22층의 규모로 도서휴게실, 비즈니스룸, 카페, 푸드코트, 금융시설 등 다양한 편의시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


대도시의 종합병원은 점점 그 규모가 커지고 있습니다. 노인 인구 증가로 병상 수요가 늘고, 교통이 발달하면서 다른 지역의 환자까지 흡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통신기술이 발달하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의료 활동이 가능해질 거라 예상했지만, 규모의 경제를 따라 대도시의 의료건축들은 더욱 거대해지고 있습니다. 초대형 주상복합아파트처럼 위압적인 규모를 자랑하는 최신 병원들은 때로는 친밀감을 잃은 듯도 보입니다. 하지만 호텔이나 백화점에서나 볼법한 대형 실내 공간들은 ‘병’이라는 우울한 상황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합니다. 


광장과 같은 외부 공간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로비를 만들거나, 천창(天窓)을 통해 자연광이 유입되는 아트리움을 넣는 방식들이 그 사례입니다. 이러한 대형 실내공간을 얼마나 특색 있게 만드는 지가 앞으로의 병원 건축에서 중요한 과제가 될 것입니다. 정중하거나 편안한 분위기를 넘어서 코엑스몰의 별마당 도서관처럼 즐거움을 주는 이벤트 공간으로 변신하거나 싱가포르 창이 공항처럼 이국적인 연출을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AMC병원

[ 암스테르담의 AMC병원은 대형병원이 놓치기 쉬운 도시의 매력을 유니크한 디자인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wikimedia)]


이러한 선례를 찾자면 1981년에 문을 연 암스테르담의 병원 AMC(Academic Medical Center)로 거슬러 갈 수 있습니다. 다윈처, 이스타, 크라머, 반 빌레헨이 팀을 이룬 이 병원의 설계는 당대의 건축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도시를 재건하기 위해 저비용에 빠른 공기, 최대한 크게 짓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덕분에 오랜 역사가 깃든 도시들의 매력이 사라지고 일상의 안전마저 위협받는 부작용이 생기기도 했죠. 


암스테르담 AMC 역시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병원이었습니다. 17세기 문화‧경제적 황금기를 대변하는 소규모 운하주택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건축물로 자칫 암스테르담만의 매력이 사라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건축가들은 실내에 골목과 광장의 특징을 이식하기로 했습니다. 넓은 공터와 높은 층고로 답답한 실내 분위기를 바꾸고, 바닥은 보도블록과 같은 재료로 마감했습니다. 심지어 건물 안에 길에서 보는 표지판과 가로등을 배치하기까지 했습니다. 의자는 트램 정류장에서 볼 법한 디자인이고, 퐁피두센터처럼 튀어나온 설비 배관은 하나의 오브제가 되어 노출되기까지 합니다. 덕분에 이 건축물은 도시의 공공성과 역사성을 유지하기 위해 현대 건축이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 미래 병원은 어떻게 진화할까?


[ OMA가 카타르 알 다얀 보건지구에 제안한 종합병원은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메디컬 시티로 확장되는 비전을 제시합니다 ]


물론 종합병원의 대형화에 우려를 표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세계적인 설계사무소 OMA(Office for Metropolitan Architecture)에서 레이니어 데 그라프(Reinier de Graaf)가 이끄는 팀은 카타르 알 다얀(Al Daayan) 보건지구에 위치한 병원을 설계하면서 지금까지의 병원 건축물들을 진단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병원 건축물 중 준공시기와 유지기간을 통해 병원의 수명을 따져봤죠. 15세기에 지어진 밀라노의 마조레 병원(Ospedale Maggiore)은 486년, 17세기 비엔나 종합병원은 260년, 19세기 런던의 로얄 허버트 병원(Royal Herbert Hospital)은 112년, 이렇게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병원의 수명은 점점 짧아집니다. 20세기 이후 폭발하듯 증가한 병원들은 40년을 넘기 어려워졌습니다. 이렇게 최신 병원일수록 철거 속도가 빨라진다면, 병원 건축이란 완성되는 순간 쓸모가 없어지는 건 아닐까요? 빠르게 등장하는 새로운 의학 기기도 병원 수명을 결정짓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더군다나 코로나 위기 속에서 우리는 학교, 체육관, 운동장, 크루즈, 컨테이너, 열차, 비행기 등 다양한 공간들이 임시 병원이 되는 사례 또한 목격했습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OMA는 “지금과 같은 대규모 병원이 우리에게 과연 필요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1,400개 병상을 수용하는 카타르의 병원은 저층으로 넓게 펼쳐지는 배치가 특징입니다. 추후 확장과 공간 재구성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위해 십자형 조립식 유닛을 적용했습니다. 각 그리드는 중정을 중심으로 병실이 놓이며, 정원은 각 구역에 따라 파빌리온(Pavilion, 가설건물) 형식의 구조물이 들어설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는 인력을 대체할 로봇 역시 적극 활용되므로 로봇이 자율적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동선들도 병실 아래에 거미줄처럼 엮이게 됩니다. 혁신적인 부분은 병원 건물만이 아닙니다. 인근에 의약품 생산을 위한 도시형 농장이나 로봇을 위한 물류센터, 태양광 발전소 등이 지어지며 병원을 넘어선 자급자족형 메디컬 시티로 그 기능이 확장됩니다.


[ 메기센터 바츠는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세인트 바르톨로뮤 병원 옆에 위치해 불투명한 유리와 패턴화된 색유리로 힐링의 공간을 선사합니다 ]


의료시설이 주는 역할에 대해서는 영국의 메기센터(Maggie’s Center) 사례들도 살펴볼만합니다. 메기센터는 조경가인 메기 K. 젱크스(Maggie Keswick Jencks)가 남편인 건축 이론가 찰스 젱크스(Charles Jencks)와 함께 1996년에 설립한 암 환자 공동체입니다. 자신이 유방암 환자로 지내면서 느꼈던 여러 불편을 해소하고자 만든 이 센터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환자도 일상을 살아가는 인간임을 잊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환자도 독서나 사색의 시간이 필요하고, 친구를 만나 차를 마시는 기쁨도 누려야 합니다. 환자뿐 아닌 방문한 가족이나 친구들 역시 슬픔을 위로하고 심리적인 치유가 필요하죠. 


2017년에 완공된 메기센터 바츠(Maggie’s Centre Barts)는 12세기에 설립된 런던의 세인트 바르톨로뮤 병원 북쪽 모서리에 위치합니다. 금속 프레임과 이를 덮는 불투명 유리가 시선을 끄는 이 건물은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병원과 이웃하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로 한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건축가 스티븐 홀(Steven Holl)은 방문자의 편안함을 위해 빛과 소리를 조절하는 기능뿐 아니라 모두의 건강을 기원하는 심정까지도 파사드* 디자인에 담으려 했습니다. 

*파사드(façade): 건축물의 주 출입구가 있는 정면부.

3층 규모의 건축물은 뼈대가 되는 콘크리트, 핏줄의 역할을 하는 금속 프레임, 그리고 피부 역할을 하는 유리로 구성되어 신체 구조를 은유하고 있습니다. 90cm 간격을 띈 금속 프레임과 기호처럼 패턴화한 색유리는 오선지가 등장하기 전 음의 높낮이를 표시하던 네우마(neume) 표기법에서 받은 영감을 받아 표현한 것입니다. 마치 ‘건축은 동결된 음악’이라고 표현한 괴테의 말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디자인입니다. 음표처럼 리듬을 갖는 색유리는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와 다를 바 없는 성스러운 빛을 연출하고, 네우마의 그리스 어원인 ‘프네브마(pnevma)’는 생명력을 의미한다고 하니 신의 가호를 담고자 한 마음에서 출발한 프로젝트가 아닐까 합니다. 오래된 도시의 유산을 외형적으로 모방하는 방식 보다는 창작에 담긴 의미와 전통의 새로운 해석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라 하겠습니다.


이처럼 병원 건축은 사용자의 ‘건강한 삶’에 기여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의료기능에 충실하기도 하며 심리적 치유를 고민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스마트 시티와 연결되어 도시의 역할까지 변화시키기도 하죠. 인간은 본래 집에서 태어나 집에서 죽는 존재였음에도 현대에 와서는 낯선 병원이 우리 생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집 못지않게 그 역할과 기능이 확대되고 있는 만큼 공간에 대한 연구와 변화는 계속 진화할 것입니다. 그 방향성은 아직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누구나 건강하게 살다 편안한 최후를 맞이하고 싶다고 말입니다. 



글. 배윤경


건축가 배윤경은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와 네덜란드 베를라헤 인스티튜트(Berlage Institute)를 졸업했습니다. 현재 연세대학교와 단국대학교에서 건축 설계와 이론을 강의하고 있으며, 오기사디자인 소속으로 여러 미디어에 건축 관련 글을 쓰고 강의도 합니다. 저서로 <암스테르담 건축기행>, <DDP 환유의 풍경>, 아모레퍼시픽의 <New Beauty Space>, 현대카드의 <The Way We Build>가 있습니다.


◆ 이 칼럼은 필자의 주관적인 견해이며, 현대건설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사진= 게티이미지코리아, 위키미디어